고군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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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신앙인들의 고군분투(孤軍奮鬪)

 

박성산이 담임하는 서빙고교회에 출석하는 이혜열이라는 여신도가 있었다.

그녀는 이화여전에 다니던 당시로서는 엘리트였으며 사대부집 외동딸이었는데 그의 부모는 "우리 딸이 교회에 나가더니 한 밤중에 요상스런 헛소리를 하게 되었다"며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종용했다. '한 밤중에 요상스런 헛소리'란 방언기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딸아이를 버렸다'고 집안에 감금까지 불사했으나 이혜열이 끝끝내 굽히지 않자 그의 부모들이 "엿새동안 학교에 가고 일요일날은 또 교회에 가니 사대부집 외동녀가 떠돌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며 "학교를 그만두던지 교회를 그만두던지 둘중 하나를 택하라"고 최후통첩을 하자, 이혜열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그만 두고 교회봉사에 전력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회인 서빙고 교회와 동교회인 일동 럼시 선교사가 

이땅에 온지 5년만에 세워졌으며,럼시 선교사 .허홍 목사가 개척,박성산 목사가 담임했다. 

 

 

▶박성산.배부근.허홍(우측은 박성산 목사의 처남 유지욱목사) 세분은 한국 하나님의 성회 3대 거목으로서 험시입국이후

 1928년부터 1953년 4월8일 교단이 창립되기 까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굴하지 않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 일념으로 오순절 신앙의 맥을 이어 왔던 주역들이다

 

 

 

 

 

▶박성산.배부근 목사

 

 

 

 

이혜열은 그 후 원산 웰슨신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신학계의 태두(泰斗) 송창근 박사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렇게 교인들의 신앙이 열심이어서 서빙고교회의 경우 장년이 1백명까지 돌파했다. 럼시선교사의 기도와 박성산 목사의 강력한 리더쉽에 서빙고교회가 나날이 부흥해 갈때에 럼시선교사는 일본 오순절교회에 출석하는 비행사 김동업·다이꼬 부부를 한국에 불러서 함께 일하도록 주선했다. 김동업 장로는 원래 경상남도 안동출신으로 소년시절 때 일본으로 건너가 일등비행사가 되었으며 한국 최초의 2인 비행사중 한사람이었다. 김동업 장로는 일등비행사이면서도 자동차운전까지 배운 팔방미인으로 결혼도 다이꼬라는 일본여자와 해서 화제거리가 되기도 했다. 김동업·다이꼬 부부는 열렬한 오순절 신앙인으로 비행기에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글을 써붙이고 다닐 정도였다. 이들은 서빙고교회를 교역자 못지않게 받들었으며 조선오순절교회 최초 장로 백승학 장로에 이어 장로장립을 받았다. 1930년 한국에 오순절신앙이 전래된지 2년후에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교인 팔선선교사가 한국에 개인자격으로 선교하러 왔고, 팔선은 곧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인 벳시, 메르테드 선교사를 한국으로 불러들었다. 벳시, 메르테드 역시 영국 하나님의 성회 교단 파송선교사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하나님의 음성만 듣고 온 선교사들이었다. 메르테트는 영국 런던에서 여자고등학교 교장이었고 벳시는 백화점을 경영하는 경영자였다. 벳시, 메르테트, 팔선은 일본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배부근 목사와 사직공원 정면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수창동교회를 세웠다. 

 

 

 

▶배부근 목사가 벳시.메르테트.팔선 건교사와 함께 개척한 수창동교회 주일학교 어린이들과 함께

 

 

배부근 목사는 강원도 춘천에서 부친 배덕노와 모친 연안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1906년 6월 16일 출생하였다. 1913년에 한문서당에 입학하였으나 불행하게도 그가 13세에 모친이 별세하여 가세가 기울어졌으나 굴하지 않고 배영학교에 입학했고, 1925년에도 동학교장 부라만선교사에게 신앙사사를 받았으며, 졸업후 친척들과 동네유지들의 도움으로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나고야(名古屋)에서 신학원을 다녔다. 그후 죤 주르겐 센 원장이 경영하는 신학교에서 성령세례를 받아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1931년 귀국하여 수창동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임대료는 팔선 선교사가 부담했다.  

 

한편 동양을 재패하려는 일본의 야망은 마침내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즈음 기독교계는 세계신학의 조류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려 들어갔으니 당시 신학적인 대결로 유명했던 이는 평양신학교의 박형룡(朴亨龍) 목사와 숭인상업학교의 교수(敎誰) 김재준목사였다. 김재준 박사는 「신학지남(神學指南)」에 투고한 "이사야의 임마누엘 예언연구"에서 성서축자영감설(聖書縮字靈感說)을 반박하고 한국교회의 주체의식을 방해한 선교사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박형룡 박사는 성서축자영감설은 사도적 전통의 정신앙(正信仰)을 그대로 보수하는 신학이라고 믿고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과 축자무오설(縮字無誤說)에 든든히 서서 성서에 대한 비판적 해설을 단호하게 정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남대문교회 김영주 목사가 창세기의 모세저작을 부인하고 나왔고, 김준배 목사는 여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해설을 내려 장로교 총회에 기소되었는가 하면, 1935년에는 감리교 선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유형기 감독 편집으로 펴낸「어빙던Abingdon 단권주석」에 대한 정통성시비가 문제가 되어 역자(譯者) 송창근, 채필근, 한경직 목사들에 대한 공개사과와 그 책을 사지도 읽지도 않을 것을 결의하기에 이른다. 

 

장로교 뿐만 아니라 1907년 복음의 포문을 열고 이 땅에 성결의 신앙을 선포하기 시작한 성결교회도 교권싸움에 휩싸여 여기서 밀려난 소수목사들에 의해 새교단이(하나님의 교회) 구성된다. 1930년대의 어수선한 돌풍 속에서 교회를 박해하는 일제(日帝)의 세력은 신도(神道)에 복종하는 것으로 걸림돌을 놓았다. 신도는 국가종묘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의 마땅한 의무이지 종교가 아니라고 강요하여 집요하게 교회와 각 교단 선교부에 요구해왔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 신자들과 선교사들은 이를 우상숭배 행위를 보아 이를 거절했다. 여태껏 유일신 신앙을 전파하고 실천해 오면서 조상숭배의 유혹마져 거부해 온 과거를 가진 기독교가 목숨을 걸고 신앙의 순결을 수호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서빙고 교회 제자들과 주일학교 교사들 담임 박성산목사.럼시 선교사 

 

 

 

오순절 교회의 부흥

 

이러한 환경 속에 조선오순절교회는 두 팀으로 나누어 선교할동을 했으니 박성산, 허홍은 럼시선교사와 배부근은 벳시, 메르테드선교사와 함께 손을 잡았다. 박성산, 허홍의 경우, 당시 서빙고는 어촌마을로 기독교에 대한 일반상식도 전혀 없었고 어민들은 배타적이여서 복음을 잘 받아 드리지 않았다. 유교, 불교, 샤마니즘 등 토착종교가 뿌리박힌 가시밭에 복음을 전하기란 용이한 과업이 아니었으며 또한 일찌기 복음의 씨앗이 뿌려져 대목(大木)이 된 장로교, 감리교 사이에 오순절신앙의 뿌리가 내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으나, 늦은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서빙고에 오순절신앙이 불이 붙기 시작했다. 박성산이 여느날과 다름없이 유지욱, 김동업, 단희동, 단희옥, 최용돌 등 교회청년들과 함께 북을 치며 노방전도를 하는데 난데없이 동네청년이 다가와 "시끄럽다!"고 하며 북을 치고 있는 박성산의 손목을 비틀며 발길질했다. 청년은 동네의 난봉꾼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성산은 근 2개월간을 치료해야 하는 고난을 당했으나 교회는 나날이 부흥되어 1934년 장년 70명, 주일학생 200명까지 불어났다.

 

이즈음 교회를 동빙고로 옮겨야만 했는데, 그 이유는 개인자격으로 온 럼시선교사가 매월 어마어마하게 지불되는 교회 임대 셋돈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1938년 10월 럼시선교사가 한국에 온지 10년만에 조선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안수식이 있었는데, 이때에 안수위원은 영국 오순절교회 감독 카타 목사, 썽무라 목사였으며 허홍, 박성산, 배부근 세 사람이 정동(井洞) 시병원(施病院)에 위치한 조선오순절교회 선교본부에서 임직을 받았다. 

 

 

▶1934년 한강뚝섬에서 집례된 서빙고교회 침례식은 한국 A.G사상 최초의 침례식이라는데 크나큰 의의가 있다 

 

1938년 당시 조선오순절 교세 현황은 아래 도표와 같다. 

년 도

포교소수

신자수

교역자수

1934년도

2

99

7

1935년도

3

113

8

1936년도

3

130

9

1937년도

6

173

10

 

 

 

 

 

이것은 1939년 1월 31일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에서 펴낸 「朝鮮의 종교 및 향사일람」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오순절교회는 수창동교회에 이어 연희장교회가 세 번째로 창립되었다. 당시는 능만이라 하던 곳에(지금의 북아현동 중앙여중 동남쪽) 자리잡았으며 한식 와가(瓦家)로서 위풍이 있는 집이었는데 허홍 목사가 개척했다. 그 뒤 허홍 목사는 럼시선교사와 흑석동 집회소를 세웠고, 배부근 목사는 1939년에 당인리에 개척교회를 세웠으며 박성산 목사는 연신내 장터에 연소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1937년,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난 뒤 기독교계에 서서히 마수를 뻗쳐왔으니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이다. 숭실학교 교장 맥균(윤산온 박사)은 평남거사에게 불려가 신사참배를 강요 당했다. 그는 거절후 교직자격을 박탈당하고 종래는 미국으로 출국당하는 행패를 겪어야 했다. 국민의 얼을 빼앗으려는 정책과 기독교 박멸기도에 반발하면서 끝까지 견디며 애쓰던 선교사들은 마침내 선교위원회를 소집하여 신앙의 자유가 보장받지 못하는 미션학교의 폐쇄를 결정하고 말았다. 한국인의 자주의식을 일깨우며,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이 땅 사람들의 일본화를 외롭게 막고 있던 든든한 보루(堡壘)인 기독교 학교의 폐쇄는 선교사는 물론 한국지성인들을 비탄과 실의에 젖게했다. 미나미총독이 일본에 보고차 귀국했을 때 어떤 고위층관리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한국에 10만의 독립군이 있다면서요?" "무슨 말입니까? 내선일체가 잘되고 있는데요.""그래요. 그 기독교인 10만을 조심하시오. 그들이 모두 독립군이란 말이요" 

 

 

일본관리들에게 확실히 기독교인들은 눈에 가시였다.

그들은 한국얼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는 기독교회를 할 수 만 있으면 파산시켜 버리든지, 예속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를 만들기 위하여 갖은 압력을 다하는 가운데,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그 정절을 시험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속에 깊게 깔린 일본인들의 본심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러나 감리교나 캐나다 선교부만은 처음부터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신사참배가 정치적인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는 일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 계통의 학교들은 폐쇄되는 수난을 모면할 수가 있었고 교역자들도 그다지 어려움 없이 난국을 피해갈 수 있었다. 1938년 일본은 장로교 9월 총회를 기해서 결판을 내기로 결정하고 조직적인 파괴공작을 시작했다.

지방노회에서 하던대로 강경파 목사들은 개별적으로 만나 설득과 강압으로 양온작전을 펴서 눌러버렸고 끝까지 반대할 사람들은 총대에서 제하여 버렸는데 주기철, 채정민, 이기선 목사같은 이들이다. 마지막까지 한국기독교의 양심의 보루로 정절을 지켜주었던 한국 장로교도 1938년 9월9일 제 27회 총회에서 한국 장로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치욕스런 신사참배 결의안을 총회장 홍택기 목사의 이름으로 가결해 버렸다. 친일 발언과 친일 행동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던 이런 상황하에서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결코 않된다"라고 소리치는 참된 신앙양심을 가진 교역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현장에서 체포 당하여 옥중에서 순교의 면류관을 쓰기까지 투쟁했다.

 

그러나 이 신사참배 결의안은 실로 친일파 지도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에서 나왔다기 보다, 닥쳐오는 거센 파도에 밀리는 약체 한국교회의 소리없는 통곡이었다. "신앙이 약할 때마다 하나님의 의는 점점 알기 어려워 집니다. 그러나 위대한 힘을 가진 복음에 우리가 사로잡힌 바가 된다면, 어찌 우리를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영 안에서 끊을 자 있겠습니까?"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않은 채 결의봉을 두드리던 총회장 홍 목사였으나 그의 심정도 그의 취임사에서 밝히고 있듯 간음 당한 여인의 슬픈 애소를 담고 있었다. 장로교는 제 27회 총회 이후 강압에 눌려서 일본의 사주에 따라 춤추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역자는 그해 노회에서 제적시켰고, 목양지를 빼앗았다. 일제는 속속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를 투옥, 감금시켰다. 모진 고문을 가하여 변절을 강요했다. 그 때에 주기철, 손양원, 주남선, 한상동, 이기선, 최봉석, 박관준 장로, 박의흠 전도사, 감리교의 이영한, 침례교의 전치규, 성결교의 손갑종, 안식교의 최태현 목사를 위시, 2천여 신도가 투옥 당했으며 2백여 교회가 교회당 문짝에 못질 당했고, 50여 교역자가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기독교연합공의회나 YMCA, YWCA가 해산 되었다. 선교사들은 소속 노회에서 제명 당하여 홀로 산간 벽지를 찾아 다니며 전도의 길에 나섰으나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사실상 선교사업은 동결된 상태였다. 1940년 10월, 드디어 서울에 주재하던 미국 공사(公使) 마쉬는 선교사의 완전 철수를 명령하여 8분의 5에 해당하는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귀환하고 말았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 한국 선교를 위하여 몸바치고자 하는 선교사들에게 일제(日帝)는 엉뚱한 죄명까지 씌워 그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일본은 1941년 12월 18일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후, 원한경 박사를 위시한 잔류 선교사 40명을 전원 투옥시키고 말았다. 그러다가 이듬해 6월, 일본인 비전투원과 교환하여 이 땅에 복음과 민족 문화를 심어주기 위하여 간절한 땀을 뿌리던 선교사를 모두 출국시켜 버리고 말았다. 이 때의 사정을 「이화 70년사」의 한구절에서 찾아 보기로 한다. 

 

"1941년 11월 15일은 미국 사람들을 실어가는 마지막 배가 인천에서 떠나는 날이었다. 이들을 송별하려는 선생님과 학생대표들은 인천행 기차를 탔다. 그러나 찻간은 벌써 미리 갈라 놓아서 앞간에서 뒷간에 서로 '있거니…' 하는 것으로 위로가 될 뿐이었다. 배가 닿은 인천부두 가에는 정사복 형사들이 씨끌씨끌하고 경계가 삼엄했다. 배 곁에는 쇠사슬을 쳐놓고 서로 가까이 가지도 오지도 못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환송객들은 많이 나왔다. 수십년 동안을 사랑하는 부모와 같이 정이든 선생님들, 한국에 나와서 갖은 고생을 다해오신 이 사도들은 오늘날 무슨 큰죄나 지은 것처럼 모욕적인 제재와 구속을 받으면서 이 땅으로부터 쫓겨 나가는 것이다. 우리 학생들과 전송객 일동은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먼 발치에서 눈물을 흘리며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혹시 쇠줄 옆에 까지 간다해도 그들과 아무얘가도 할 수는 없었다…". 

 

이 땅에 오순절신앙을 전교하러왔던 영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벳시, 메르테드와 미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팔선, 럼시등도 1940년 12월 20일 서빙고교회에서 쓸쓸하게 환송예배를 드리고 난 뒤 강제출국을 당했다. 워낙 미약하던 교세에 기둥같은 선교사들을 잃은 조선 오순절교회는 일본의 종교박멸정책에 눌려 깡그리 폐쇄되어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성령받은 성도들은 환란과 핍박 중에도 각자의 신앙을 유지하였으니, 비록 공중에서 실끊어진 연처럼 된 조선 오순절교회라 할지라도 각인의 가슴에는 성령의 불꽃이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일제는 이때부터 구미(歐美)식 교파명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일본 기독교단 조선교단(1945. 8. 1)으로 만들었으며 재림사상을 강조하는 성결교회(1943. 5)나 침례교(1942. 6. 10) 안식교(1943. 12. 28)등 군소교단들은 전체 교역자를 일제히 구속하는 바람에 교회는 자연 폐쇄되고 말았다. 이렇듯 강압의 힘으로 누르는 일제의 박해와 수난 속에서 한국교회는 구약이 잘리워 먹혔고 오직 사복음서(四福音書)만 유통되는 일본 조선교단의 일원으로 기진맥진한 모습이 되어 끌려갔다. 

 

더욱 교회를 슬프게 한 것은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친일행위였다. 솔선하여 황도(皇都)시민으로서의 보국(報國)의 성(誠)을 다하려고 안간힘하던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1938년 12월 12일 전국 교회를 대표하여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오, 이명직 목사등이 이세대묘강원신관(伊勢大廟 原神官)을 비롯하여 내지신궁 참배차 서울역을 출발하였다. 그뿐이었는가?

과거 교회의 반국가적인 행위를 사죄한다고 교회 중진들을 이끌고 한강 백사장에 나가 미소기바라이를 감행했다. 이렇게 기독교 황도선양연맹(基督敎 皇都宣揚聯盟)이 결성되었고 시국대응전선사상, 보국연맹황도문화관, 국민총력 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 임전보국단이 조직되어 제 2차 세계대전 말기 전세계가 겪었던 인간성의 강간(强姦)을 한국교회는 너무도 몸서리치게 당하고 있었다. 1943년부터는 주일낮예배 이외에는 모든 집회를 금했고 주일학교예배도 일요수련회(日曜修鍊會)로, 교회부흥회는 연성회(鍊成會)로 개칭하고 교회집회에 까지 필요이상으로 전시(戰時) 체제화시킨 것이다. 농촌교회에서는 예배당을 일본어강습소 혹은 근로작업장(勤努作業場)으로 전락시켰으며 그리고 도시교회들은 무조건 폐합시켜서 단일교회로 만들고 남은 예배당은 군용공장(軍用工場)으로 징발했었다고 고대 민족문화연구소(高大 民族文化硏究所) 발행「한국문화사 대계」에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당국의 강제명령에 불복종하는 교회지도자들은 투옥되거나 함구령 또는 금족령을 내려 활동을 억제당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이들은 지하에 숨어서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을 일으켰으며 이것을 알아차린 일본 위정자는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교회지도자들을 1945년 8월 18일을 기하여 학살할 계획을 세우고 명단작성과 살해방법을 강구했다고 한다. 

 

오순절교회의 해산

 

오순절교회가 강제 해산당하는 와중 속에서 오순절교단 포교관리자 허홍 목사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난세에 중병까지 걸렸다. 배부근 목사는 안국동 소재 구영숙(具永淑) 소아과 병원에 약제사(藥濟士)로 취직을 해서 생활을 꾸려가다가 1944년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했고, 박성산 목사는 또한 광화문에 성문당이라는 서점을 내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후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진가 와가 다밋도 치오 나가스노오 시노기 가다구 무조겐 고-후구(우리 백성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무조건 항복 …… )"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8월 15일 광복은 진정 한국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던 민족의 감격이었던가,

한국교회는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문서가 읽혀질 때, 미친듯 깨진 종을 두들기며 울었고 갈갈이 찟긴 한국 교회의 교우들의 상처받은 가슴에 흥건히 괴어오는 감격의 눈물을 가눌 수 없었다. 얼마나 유린당한 기독교였던가?

일제는 8월 18일을 기해 기독교 지도자들을 전국적으로 살해해 버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하니 8·15광복은 확실히 수난을 받은 민족교회에 내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이었다. 

 

一九四五年 八月 十五日 正午 !

침략자의 무조건 항복에 수문(水門)을 열고 터져나온

흥분과 기쁨과 감격의 물결

아, 넋과 육체에 격발(激發)되었어라

그대는 들었던가, 보았던가, 겪었던가,

고향잃고 만주로 상해로 객성(客星)처럼 방황하다가

광복 조국에 안기는 귀환 동포와 

패전 모국으로 줄행랑치던 행렬을 

미물(微物)도 제소리로 사는데 국어를 잃는 등 

니뽄도(日本刀)에 갈갈이 찢어진 온갖 것들…

게다(木靴) 짝 밑에 오금 못펴고

노상 굴욕의 쓴잔을 마셨더니

아아, 풀린듯 하다 조여만 가던 

시대의 매듭이 끊어졌에라,

원없이 마른 얼굴,

정지된 강물이 흐르고

서투른 목청뽑아 모두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이 놀라운 사실은 

이국(異國)에서 불티처럼 사라져간 애국지사와,

기독교인의 목숨건 기도,

아니, 제단에 뿌려진 순교자의 선혈… 

아아, 깃발이여, 아우성으로 물결 휘어 휘어라.

 

조국 광복과 오순절 교회의 재건

 

조국이 광복되자 그 동안 해외로 떠나갔던 많은 인사들이 귀국하였다. 그 중에 일본 오사까(大坂)에서 오순절 신앙을 전교하던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 목사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망국의 슬픔과 절망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더러는 10년만에, 더러는 15년만에 귀국선을 타고온 그들이었지만 가슴에 표현할 수 없는 회한과 기쁨이 쌍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청년 곽봉조는 이찌오까에 있는 일본인의 오순절교회의 노방전도대에 의해 입교했는데 이 노방 전도대는 특히 야간에 수 십개의 큰 초롱을 들고 많은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전도를 다니는데 거기에 끌려서 이찌오까교회까지 갔다가 입교한 후 이코마신학교에 입학하여 사도의 길을 밟았다. 레오나드 렌-큐츠 목사가 경영하는 이코마신학교에 들어간 곽봉조는 6개월 동안이나 교리문제로 번민하였는데 이유는 "성령세례의 외적증거는 방언이다"라는 교수의 주장 때문이었다. 그는 사도행전을 깊이 상고하며 기도하다가 성령을 받고 방언까지 하고 나서야 오순절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이코마신학교를 제 1회로 졸업한 뒤, 오사까에 조선 예수교 오순절교회라는 간판을 걸고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곽봉조는 '조센징'이라는 일본인들의 비방과 모욕에도 굴하지 않고 낮에는 직장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는 온 시내를 누비며 노방 전도를 했다. 이즈음 청년 윤성덕이 영국인 선교사 구도사의 오순절 집회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아 과거를 회개하고 동역자가 되었다. 윤성덕 목사는 1894년 6월 1일 전남 무안군 암태면 송곡리에서 출생했다. 

 

 

 

▶오순절 운동을 확산시킨 여결 박귀임 전도사  

 

 

세 살되던 1896년 해상사고로 부친을 잃고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그는 암태리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했다. 1912년 고향 마을에 사는 문은각과 결혼한 그는 1915년 고향 친구 박봉연에게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청년들과 독립운동을 추진하다가 실패를 하자 1932년 돈도 벌고 공부도 하자는 마음으로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돈을 모은 윤성덕은 1933년 어느날 신앙과 자신의 생활을 비춰볼때 너무나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뒤 자살을 하려고 전철 레일을 목침삼아 베고 누웠을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왔다. 귓가에 은은하게 맴도는 소리에 끌려 발길을 옮기니 그 곳은 오순절 천막 전도집회였으며 영국인 선교사가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영국인 선교사 구도사에게 은혜를 받은 윤성덕은 그날로 구도사와 친밀한 관계가 됐고 곽봉조 목사는 윤성덕에게 신학공부를 권면하여 마침내 이코마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한편 곽봉조가 개척한 한인교회에 박자신(朴慈信)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박자신은 원래 전남 무안군 암태면 출생으로 임구만이라는 돈많은 사람과 결혼하였는데 부군이 일본 오사까에 사업을 시작해서 일본까지 왔다가 곽봉조 목사의 설교에 감화를 받아 입교하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중, 고국에 있는 시모(媤母) 이복덕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했고 이복덕은 이 복음을 받아 드렸다. 이복덕은 원래 해남에 있는 모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재산이 많은지라 교회에 재정적으로 적극 후원하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오순절 신앙을 받아 드린 후, 방언, 예언, 신유의 역사를 전파하니 해남일대에 큰 소란이 나게 되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복덕의 설교에 감동 감화를 받게 되자 그 곳 장로교회에서는 이복덕을 책벌 출교까지 시켰다. 

 

이복덕이 출교당하자 그를 따르던 신도들이 힘을 모아 조그마한 집회처소를 마련해서 예배를 드렸다, 이복덕의 설교에 감화를 받은 사람중에 표씨 부인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이 사람 또한 은혜를 체험한 뒤에 자기집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가정예배를 때때로 드렸다. 이 집회에 상당수의 신도들이 출입했던 바, 그 중에 한 사람이 박귀임이다. 박귀임은 목포시 옹금동에서 1912년 1월 9일 태어나 상업에 종사하는 문성원씨와 1938년 결혼한 뒤, 줄곧 병마에 시달려 오다가 친구의 딸의 전도를 받고 어릴 때의 신앙이 되살아나 논산감리교회를 출석하고 있었는데 1943년 이성봉 목사의 집회를 통해 은혜를 체험한 뒤, 1947년 목포에 내려와 표씨 부인을 만나 오순절신앙을 받아들였고 1947년 6월 표씨 부인 집에서 성령세례를 받았다. 박귀임은 순천철도국에 근무하는 남동생 집에 가정집회소를 세우고 크게 역사할 즈음 순천중앙장로교회 교인들이 이 오순절신앙을 사모하게 되자 동(同)교회 목사는 박귀임과 동조하는 신자들을 교회에서 출교시켜 버렸다. 그리하여 순천경찰서 남쪽 남내동(南內洞)에 있는 적산(敵産) 가옥 하나를 빌려 집회소로 정하고 대한기독교 순천 오순절교회라 간판을 붙였다. 한편 해방이 되어 흥건히 괴어오는 간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 1946년 11월 3일 그날은 주일이었는데 북쪽만의 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기독교 박멸을 목표로 실시되었다. 이북 5도 연합회는 즉각 주일날은 예배 이외의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요지를 골자로 한 결의문을 당국에 서면으로 발송했고 공산당은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이 교회 박해라는 철퇴를 가하기 시작했다. 

 

우선 교역자를 투옥시키고 강제노동에 동원했고 동년 11월 28일 '기독교연맹'을 조직하여 공갈과 협박으로 모든 교회를 거기에 가맹시킨 후,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의 앞잡이로 악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불행하게도 부흥사 김익두(金益斗) 목사는 기독교 연맹관계로 그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일은 한국교회 역사에 너무나 슬픈 사건이었다. 북한 교회가 이렇듯 공산당 박해에 피흘림을 당할때 남한교회는 그래도 자유를 누리며 교회재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감리교는 1945년 9월 8일 동대문교회에서 이규갑(李奎甲) 목사를 위원장으로 재건 총회를 개최했고, 성결교회는 45년 11월 천세광(千世光) 목사를 총회장으로, 구세군은 46년 10월 황종율(黃鍾律) 정령을 서기장관으로, 침례교는 46년 2월 충남 부여에서 재건 총회를 개최하고 미국 남침례교와 정식 유대관계를 맺고 동아기독교(東亞基督敎)라 칭하던 교단명을 '대한 기독교 침례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러나 장로교는 복잡하고도 어수선한 가운데서 교회 재건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 투옥됐던 옥중 성자들이 출옥하고 난 후, 변절과 타협으로 수난을 회피했던 교역자들은 숙연한 자세로 참회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자기변명과 교권장악에 여념이 없었다. '수절자(守節者)와 변절자(變節者)'라는 갈등과 대결로 시작하여 교회분열이 잉태되고 있었다. 여기에 고려신학교 문제와 조선신학교 문제가 어수선하게 겹쳐서 풀려야 할 실마리는 더욱 얽혀들고만 있었다. 고려신학교는 장로교의 재건이 교회의 정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바른 신학교육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한상동(韓尙東), 주남선(朱南善), 박윤선(朴允善) 목사들에 의해 1946년 9월 20일 개교되었는데 수절파의 세(勢)가 자라는 것을 용납지 않으려고 1948년 9월 부산에서 모인 경남노회는 인가 취소를 결행했고, 1949년 4월 제 35회 총회에서 역시 교려신학교는 총회와 관계없다고 결의했다. 결국 수절파는 1951년 6·25 한국전쟁 발발 이듬해 고신파(高神派) 장로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그런가하면 조선신학교는 1939년 3월 채필근, 김영주, 차재명 목사와 김대현 장로에 의해 승동교회에서 개교된 학교로 김재준 박사를 중심으로 개성있는 신학교육을 실시해 왔다. 한국교회의 과거와 현재 전부를 신학부재(神學不在)라고 단정하고 ①세계적 수준의 신학사상과 복음전파 ②경건과 연찬을 통한 자율적 신앙 ③교수의 자유와 학설의 자유로운 소개를 통한 칼빈신학의 재확인 ④성서연구 방법에서의 비판학의 채택 ⑤한국 신학의 건설적인 면의 실현을 내세웠으나 김재준 박사의 대담한 현대신학 소개는 학생들과 교계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은 33회 총회에 '근대주의 신학사상과 성경 고등비판을 거부한다'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김재준박사는 해명서를 통해 '신구약 성서의 절대무오'를 피력했으나 이에 대해 박형룡 박사는 성경의 권위를 파괴하는 고등비판은 정통 보수주의와 양립할 수 없으며 김박사는 한국교회를 능욕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결국 총회 인준을 받지 못한 조선신학교는 신학 방법론 때문에 한국 기독교장로회로 1952년 분리해 나가고 말았다. 이때 성결교는 일제에 의해 1943년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로 인가를 받았으나 취소당한 후 다시 개교, 서울신학교로 이름을 개칭하고 교장에 이건(李鍵) 목사, 명예교장에 이명직(李明稙) 목사를 추대했다. 

 

한편, 박귀임을 중심으로 오순절 신앙동지들이 모여 순천교회를 설립하여 동(同)교회가 나날이 부흥되어 가자 전임 전도사로 박헌근 장로가 부임했다. 박헌근 장로는 일본에서 곽봉조 목사등과 인연이 있었던 바 일본 오사까의 이코마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전 장로교회에서 장로로서 교회를 받들고 있다가 순천 오순절교회 담임전도사가 된 것이다. 1949년 11월, 박헌근 장로가 부임한 뒤 순천 오순절교회는 300여명이 출석하는 큰교회로 성장했다. 한편, 광화문에서 성문당이라는 서점을 경영하던 박성산 목사는 8·15 해방이 되자 배부근, 허홍 목사와 다시 합류하여 오순절교회 재건을 위한 일환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듬해 1950년 4월 9일 전남 순천에서 제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대회로 모였는데 평신도는 200여명쯤, 교역자는 허홍, 박성산, 윤성덕, 김성환, 박헌근, 박귀임 등이었다. 

 

김성환(金聖煥) 목사는 유교사상이 농후한 선비였는데 1920년 가족이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어느날, 그의 부인이 일본의 도깨비신사(神社)에 놀러갔다가 도깨비신(神)이 들려 날마다 도깨비 소리처럼 울부짖기도하고 밤거리를 쏘다니며 악을 쓰는 바람에 새벽 일찍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이 기절하기도 하는 소동이 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이에 김성환의 집으로 몰려와서 마을을 떠나든지 아니면 부인을 쫓아내든지 하라고 강권하는 통에 견딜 수 없는 모욕과 슬픔을 느끼던 중, 마을 교회에 가서 안수기도를 받으면 귀신이 쫓겨 간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가 목사의 안수기도를 받았는데 즉시 도깨비신(神)이 거품을 흘리게 하고 물러가는 이적의 현장을 보고 그자리에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여 신앙생활을 잘하다가 8·15해방과 더불어 귀국, 전남 목포에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제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의 사회(司會)는 동지규합의 공이 컸던 박성산 목사가 맡았고 순천오순절교회를 담임하던 박헌근 장로가 성회를 인도하였다. 

 

해방과 아울러 변천기에 들어선 한국은 1946년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 그달 31일에 국회를 구성했고 7월 1일에는 새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이라 결정하고 동월 17일에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이 헌법에 의해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박사가 취임했다. 한국교회는 이에 기독교인 대통령이라 해서 손뼉쳐 환영했으나,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또 하나의 정부를 세워 조선인민공화국이라고 이름을 짓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괴뢰정부를 수립했다. 그 후 김일성은 민족의 가슴에 총질을 하며 전쟁을 일으켰으니 1950년 6월 25일이었다. 전쟁은 밀고 밀리는 숱한 접전 끝에 유엔군 3만 6천명과 한국군 30만명이 희생됐고 70만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엔군은 전쟁비용으로 150억불을 투입했다. 또한 민간인은 24만명이 죽고 13만명이 학살당했으며 8천여명의 저명인사가 납치됐으며 이때 파괴된 교회만도 2천교회가 넘고 530여명의 교역자들이 순교를 당했다. 

 

6.25와 오순절 교회의 순교자 박헌근 장로

 

6·25전쟁으로 인해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또한 피해가 컸다. 순천 오순절교회를 크게 부흥시키면서 제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때 성회를 인도했던 박헌근 장로를 잃은 것이다. 공산군이 순천시를 점령하고 갖은 만행을 다 부리는 와중에서도 숨어다니며 교우집을 심방하여 방언, 신유 등 오순절적 역사를 뜨겁게 일으키던 중 공산당 치안대원들에게 검거당하여 순천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자 공산군들은 순천시를 철수하면서 유치장에 갇혀있는 박헌근 장로를 무참하게 총기로 난사하고 도주한 것이다. 한국에 오순절신앙이 전교된지 22년이 되는 1950년 9월말, 한국 오순절교회는 최초의 순교자를 낸 것이다. 

 

 

▶최초의 순교자 박현근 장로(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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