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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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탄생

 

전쟁이 발발된 이듬해 1951년에 한국교회에서 한국군에 군종제도(軍宗制度)를 창설하여 군인전도의 문을 열었다. 이즈음 한국전쟁을 돕기위해 미국 종군(從軍)목사「엘라우드」가 입국하여 군목으로 근무하면서 한국에 있는 오순절교회를 애타게 찾아 다니다가 허 홍목사를 만나 일년동안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엘라우드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 현황을 알리는 동시에 허 홍 목사에게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유대 관계를 맺을 것을 간청하다가 1951년 한국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곧 하나님의 성회를 한국에도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하였다.

엘라우드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 미국 A.G. 동양선교부장 오스구드(Osgood) 목사가 한국에 나와 허 홍, 박성산, 배부근 목사 등을 만나 한국 오순절교회 현황을 취재해 갔고 1952년 12월 15일 한국 최초의 미국 A.G. 선교사로 채스넛(Arhber Cheesnut) 목사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 놓았다. 채스넛 목사는 원래 중국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와 있었는데 중국 전체가 공산화되자 일본에 머물면서 선교사업에 종사하고 있다가 미국 A.G. 선교 본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에 A.G.를 조직하고 관리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채스넛이 내한하자 A.G. 결성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오순절 계통의 동지와 교회를 규합하는 일을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가 맡았는데 그는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돌며 호소하였다.

그 결과 1953년 4월 8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62번지 허 홍 목사가 시무하는 남부교회에서 모여 역사적인 창립 총회를 가졌던 것이다.

창립에 참가하였던 사람들은 체스넛, 박성산, 허 홍, 배부근, 윤성덕, 곽봉조, 박귀임이고 그외 4인이 참관하였다.

이 집은 허 홍 목사의 개인 소유로 목조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은 허 홍 목사 가족과 10평 정도의 예배실이 있었고 2층은 채스넛 목사가 기숙하고 있었다.

그런데 창립총회시 교단명칭을 한국어로 어떻게 부를까 하는 문제가 대두되어 중국에서 일한 바 있는 채스넛 선교사는 중국 A.G. 처럼 "神召會"라고 하자고 주장했으나 허 홍 목사가 "하나님의 성회"로 명명(命名)하자고 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았는데 일부에서는 조직을 이룬다는 그 자체를 과히 바람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순절신앙은 성령의 역사를 힘입고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일면이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조직이 필요없다는 것이었다.

교단 명칭에 있어서는 미국 A.G. 에서도 왈가왈부가 있었다.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체스넛 선교사의 사회 허 홍 목사의 통역으로 <한국에서의 하나님성회의 조직을위한 성회를 개최하겠습니다>라는 인사와 더불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가 열렸던바,이 창립총회에 모인 이들은 채스넛,박성산,박귀임,곽봉조,배부근,김성환,허홍등이었다.

 

Pentecostal Church, Pentecostal Holiness Church, Pentecostal Evangelical Church 등으로 하자는 사람도 많았으나 레오나드(T. K. Leonard)가 히브리서 12장 23절을 인용하며 'Assemblies of God'이라고 함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여 이것이 가결되어 통과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A.G.(Assemblies of God)란 교단명칭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1927년 Assemblies라는 말을 변경하여 Church 로 하자는 주장이 지배적이어서 1914년 A.G. 결성후 13년만에 'Pentecostal Evangelical Church'로 고치기로 결의할려는 순간 실무진에서 일어나 "수많은 교회의 재산등기를 어떻게 뜯어 고치며 그 비용이 얼마나 들겠는가?"라고 하는 반론을 펴서 결국은 A.G.로 존속시키기로 못박았던 것이다. 미국에서 이런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Assemblies of God'라는 말을 한국어로 잘 번역하는데는 고심이 있었다.

Assemblies는 회합, 집회, 대회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그 일례로 국회를 National Assemblies 라고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렇다고 Assemblies를 Church와 같이 봐서 '교회'라고 번역하기도 좀 무리해서 그냥 '성회'로 한 것이며 God의 번역도 구미(歐美)의 God, Gott, Deus 등은'神'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온갖 잡신에 까지 다 통용되는 것이어서 '하나님'으로 번역해서 A.G.를 '하나님의 성회'로 가결한 것이다. 

 

그런데 A.G.의 번역된 이름 '하나님의 성회'가 종교단체의 명칭으로서는 고금동서에 가장 존귀하고 뛰어난 이름이라는 것은 감사, 찬송할 일이다.

1953년 4월 8일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채스넛선교사의 사회, 허 홍 목사의 통역으로 "한국에서의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 조직을 위한 성회를 개최하겠습니다.

……"라는 인사와 더불어 창립총회가 열렸는데 이 창립총회에 모인 이들은 채스넛, 허홍, 박성산, 곽봉조, 배부근, 윤성덕, 박귀임과 옵저버 4인을 합하여 모두 11인이었다. 토의사항은 교단창립에 관한 제반사항으로서 주요안건은 ①헌장 설명과 통과 ②헌장에 의해 총리(總理) 선출등이었다. 초대 총리에 선교사 채스넛 목사가 선출되었고 교역자 양성을 위해 세워질 신학교 교장도 총리가 맡기로 했으며 학감에는 허 홍 목사가 선출되었다. 하나님의 성회 신조는 미국 A.G. 신조 16조를 요약한 것으로 다음과 같다.

 

①우리는 성경이 영감으로 쓰여졌으며 절대무오한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②우리는 삼위(성부, 성자, 성신)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③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격, 그의 동정녀 탄생, 그의 무죄한 생애, 그의 이적들, 그의 승리적인 대속의 죽음, 그의 육체, 부활, 그는 승천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과 천년동안 온 세상을 통치하러 권능과 영광으로 이 지상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④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중재림하실 때 교회는 휴거한다는 복된 소망을 믿는다.

⑤우리는 죄의 정결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의 보혈을 믿고 회개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⑥우리는 성령으로 이룬 중생은 개인 구원에 절대요소가 되는 것을 믿는다.

⑦우리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믿는 자들의 기도를 응답하여 우리 육신의 병을 치료하여 주심을 믿는다.

⑧우리는 사도행전 2장 4절에 입각한 성령세례는 이를 구하는 모든 신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믿는다.

⑨우리는 믿는 자에게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⑩우리는 구원받은 자나 받지 못하는 자나 다 부활하되 전자는 영생을 얻고 후자는 영벌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다.

 

 

▶1953년 10월 광주에서 열렸던 광주성회

 

 

성령께서 진작(振作)케 하신 신기운(新氣運)을 따라 교단이 발족하자 모든 교역자와 성도들은 인심동체가 되어 교회부흥에 총력을 기울였고, 각 교회 또는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개최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 중 특기할만한 것은 1953년 10월 광주에서 개최된 성회로 천명에 가까운 성도가 천막에 회집하여 성령세례와 갖가지 은사를 받아 초대교회를 연상케 하였고, 마지막날 무등산록 광주천에서 3백여명이 침례를 받고 새 사람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는 실로 광주시가 생긴 이래 대서특기할 만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이로 말미암이 광주시를 영적으로 뒤엎은 셈이됐고 다른 교파에서 하나님의 성회를 경계하기에 이르렀다.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조약(休戰協定條約)을 맺음으로 외면상 전쟁은 끝났으나 교회 안의 저명인사들이 납치당하거나 순교했기 때문에 교회는 지도자 결핍에 빠졌으며 교회 지도자 결핍에서 일어난 일들 가운데 하나가 이단종파(異端宗派)의 발효였다. 주춧돌 밖에 남지 않은 전쟁의 폐허속에서 허탈한 감정과 염세적 풍조가 짙게 민족심리에 깔려 있을때 현실 부정적이고도 신비주의적 내세만을 앞세우는 사이비 종파가 서서히 민중의 빈마음을 향하여 검은 머리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샤머니즘의 무당들처럼 신비의 열풍으로 휘몰아 현실 속에 그리스도가 곧 임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도록 열광(熱狂)속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전쟁의 잿더미뿐인 암담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쉽게 이단(異端), 사이비(似而非)에 현혹되었다. 이러한 이단종파의 특징은 현실 부정적이며 내세적이면서도 경험에 의존하며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있어 가정파탄을 빚어낼 뿐만 아니라, 상식과 도덕, 성관념의 파괴, 나아가 인간성의 몰락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사이비종파는 기성교회가 뚜렷한 생의 좌표를 제시해 주지 못하고 있을 때, 폐허처럼 어지러운 교회의 담을 타고 들어오기는 너무도 쉬운 것이다.

전쟁 후, 사회와 교계에 가장 크게 물의를 빚은 교(敎)가 박태선(朴泰善)의 "감람나무교회(千用城)" 곧 "한국 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였다. 

전도관 창설자 박태선은 창동교회(倉洞敎會)에서 김치선 목사에게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55년 3월에는 김치선 목사와 미국의 스완슨 부흥사를 초빙하여 남산야외음악당 광장에서 연일 연석 대대적인 부흥회를 인도했다. 그 후 박태선은 신구약 성경에 예언된 감람나무가 자기라고 자처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된 집회를 통해 성도적 공동사회인 신앙촌을 건설하자는 자기 목적을 달성했다.

전성기에 오른 박 태선은 감람나무가 나타났으니 이제는 끝이라고 예언하고 자기는 주님의 보혈을 받았으며 자기 몸에서 이루어졌고 남에게 분배해 준다고 하는 일종의 '피가름'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에 1955년 7월 한국기독교연합회에서는 사이비운동이라고 규정하고 그 신비주의적 오류를 단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때 우연하게도 같은 때에 머리를 든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 基督敎 統一神靈協會) 문선명(文善明)과 원초적(源初的)인 동질성을 시사해 주었다. 

통일교는 1954년 5월 1일 협회를 정식 발족시키고 "십자가로서는 원죄를 벗어날 수 없어 어떤 종교라도 전부 포괄할 수 있는 넓이와 깊이를 가진 진리를 위해 기독교 통일을 표방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피의 순수성을 강조, "피의 정화만이 원죄를 구속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못다한 사명을 한국에서 이룬다"는 복귀섭리노정(復歸攝理路程)이다 이들 사이비종파들이 한국교회를 우롱하며 가진 피해를 입혀갔다. 이들 집단 말고도 전후 혼란한 사회 양상 속에서 수도원적 기도원은 전국 산천에 우후죽순처럼 세워졌고 열광적인 기도원 부흥회는 민중심리를 파고 들었다.

 

 

▶순복음 신학교 제1`회 졸업식(1953.3)

 

하나님의 성회는 1956년 봄, 채스넛 선교사가 총리직을 사임하고 귀국하자 하나님의 성회는 임시총회를 56년 4월 26일 열고 제 2대 총리에 허 홍 목사를 선임하였으니 하나님의 성회 최초의 한국인 총리(總理)가 된 것이다. 

 

순복음 신학교 개교

 

한편, 1953년 5월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 65번지 남부교회에서 출발한 순복음신학교는 초대교장에 채스넛, 학감 허 홍 목사를 중심으로 하여 서대문구 충정로 1가 21번지(지금의 강북삼성병원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1955년 2대 교장에 스텟츠(John Stetz) 선교사가 부임했다. 1956년 신학교 맹휴사건은 교단 분열의 전주곡이었다. 허 홍 목사가 2대 총리로 당선된지 반년 후인 1957년 11월 교단이 분열되었다. 당시 한국 하나님의 성회 산하에는 교리적으로 ①3위1체 신앙파와 ②오직 예수신앙파가 있었고 미묘한 이해 관계가 잠복하고 있었는데 허 홍 목사가 총리가 되자 불거져 나왔다. 

수차에 걸친 민사·형사소송 끝에 '사건'을 담당한 변호사는 하나님의 성회 간부(幹部) 중에 불의(不義)한 사람이 있다고 말했으며, 모(某) 선교사의 선교보고에 "In the early days of the organization many who gathered around the A.G. Were later found to be not truly pentecostal (성회 조직 초기에 성회에 모여든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참된 오순절 신앙인이 아니었음이 후일에 알려졌다)"는 말은 이 사건의 일부를 잘 설명해 준다. 

 

재단등록

 

1957년에는 재단법인의 등록을 마쳤는데 이는 신학교 설립과 더불어 교단발전의 전제조건을 마련한 셈이었다. 일찌기 이런 일에 눈을 뜬 교단의 지도부는 선각자적인 혜안이 있었다. 

법인설립에 공을 세운 이는 이완식씨였다. 재단법인 등록의 필요성을 느끼고 법적,행정적인 절차를 밟고자 했으나, 목회에만 전력해야 할 목사들이 그 일에 매달릴 수 없어 당시 활동 영역이 넓다고 인정되는 이완식씨에게 일임하였다. 이완식 집사는 교단 발전 및 신학교 발전에도 공이 매우 큰 사람이긴 했으나, 나중에 교단 총무를 하면서 정도에 지나치게 독선적인 행사를 하다가 선교사들과 잦은 마찰을 일으킨 끝에 교단을 떠났다.

 

 

▶1956년 3월 12일 순복음 신학교는 제2회 졸업생을 배출시키는 한편 존 스테츠선교사는 1955년 2대 교장에 취임했다

제1차 분열

 

한국교회는 전후 혼란기의 사회양상 속에서 한국의 장자(長子) 교단이라고 자처하던 장로교회도 1959년 44차 총회에서 두,세번째의 분열을 맞았다.

장로회신학교 교장인 박형룡 박사의 신학교 기금(基金) 3천만환 유용 사건에서 빚어진 교장 인퇴문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가입(WCC는 용공적이므로 한국교회의 보수와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탈퇴해야한다는 측의 주장) 탈퇴 문제를 둘러싸고 터진 불씨는 다분히 교권 투쟁적인 냄새를 풍겼다. 

 

순복음신학교는 1955년, 제 1회로 강정호, 문재호, 이태구, 정봉의(여), 조동천, 최요열, 함상군(여) 7명을 배출시켰다.

56년에는 이어 강대연, 김기병, 김옥호, 김유정, 동봉금, 마명숙, 박조수, 박광수, 박종수, 박정근, 송준섭, 이안식, 우옥암, 정두영, 조숙자, 한정희, 허순회 등 18명을 배출시켰다.

 

 

1957년 11월 하나님의 성회가 분열되자 허 홍 목사는 대한 오순절교회로 환원했고, 곽봉조, 윤성덕 목사등은 영국의 구도사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자 손을 잡고 대전시 가양동 28번지에 중도 성서신학교를 세우고 극동사도선교회의 주역이 되었다. 

 

1958년 8월에 죤스톤(R.L.Johnston) 선교사가 순복음신학교 제 3대 교장에 취임하였다. 

 

하나님의 성회 분열로 교단내 주요한 일을 맡아 하던 인물들 중에 장로교, 감리교와 인식교, 여호와 증인, 등으로 탈퇴해 나갔으며 교단 자체에 분열 소동이 끊이지 않는 동안 미국에 본부를 둔 오순절 신앙의 몇 교파들이 수입되었으니 1958년 극동사도선교회가 전개되었고, 1960년 월드선교회, 1965년 하나님의 교회, 1966년 연합오순절교회가 바로 그 교단들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전폭적인 지원

 

분열로 인해 힘은 분산됐으나 교단이 더욱 단합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미국 A.G.본부는 한국교회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나섰고, 1959년 12월 28일 아세아 선교부장 켓참 목사는 하나님의 성회 창립 이래 엄청난 쾌보(快報)를 가지고 내한했다. 즉 미국 A.G.본부는 전세계 70여개국 중에서 한국을 세계복음화 운동의 지정국(指定國)으로 결정하고 이 사업의 제 1보(步)로써 20,000$의 거액을 투입하여 교회사업, 문서사업, 선교사업, 신학교 확장 등에 쓸 것을 결정하였다는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신학교 대지 확보 및 교사 신축이전 ②대부흥회를 위해 미A.G.본부 부흥목사 파송 ③교통 좋은 곳에 중앙부흥회관(Revival Center) 을 설립하여 전국 복음화 운동을 강력히 추진할 것 등. 미국 A.G.는 토드전도단 및 보이스 오브 힐링의 양대 전도단과 중앙 복음회관 건립을 위해 협약을 맺음으로써 사업추진의 강력한 단체를 구성하였고 서대문 네거리에 대지 292평을 구입하였다.

신학교도 선교사들을 통해 대조동에 약 1만평의 대지를 사들였으며 버드 목사를 통해, 2백 5십만원, 세계복음화운동기금 4백만원 등이 모금되었고 1960년 3월 5일 신축기공식을 가졌다.

 

 

부흥의 불길

 

이때 교단의 교세 확장을 위한 3대 집회가 열렸는데 그 중 하나가 1957년 가을 미국이 낳은 세계적 부흥사 허만(Harald Herman)목사가 내한하여 전날의 법전터 중앙청앞 광장에서 24일간 집회를 인도한 것으로 이 집회는 하나님의 성회로서는 최초의 대집회였다. 또한 1958년 여름 버드(Ralph Byrd) 목사가 내한하여 수원, 대전, 부산 등지에서 성회를 인도했으며, 1961년 사무엘 토드(Samuel J. Todd) 목사가 내한하여 9월초부터 10월중순까지 서대문 네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성회를 인도했으며 통역은 당시 조용기 전도사가 맡았다.

 

 

▶샘 토드 목사가 40일 동안 연속적으로 부흥회를 가진 서대문 네거리의 서커스터 (1961)이자리를 사들여 부흥회관을 건축하다

 

 

 

▶한국의 아주사 부흥센타가 된 서대문 부흥회관(1962)

 

 

 

▶버드 목사를 통해 2백50만원. 세계복음화 운동기금 4백만원들 온갖모금을 통해 1960년 3월 5일 신축 기공식을 가진 중앙복음회관은 61년 19월 15일 준공되었으며,이회관은 순복음 중앙교회로 발전 ,그후 총회본부가 되었다

이 부흥회가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며 10월 중순까지 계속되자 때마침 선교부에서 짓고 있던 건물이 준공되어 10월 15일 선교부가 지은 회관으로 장소를 옮겨 몇 날을 더하고 끝났다. 선교부의 자금으로 지은 순복음 부흥회관(Full Gospel Rvival Center)은 지상 5층의 건물로 서대문 네거리의 명문으로 등장했고 이 중앙부흥회관이 순복음중앙교회로 발전되었다.

한편 1960년부터 10년간은 조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민족중흥(民族中興)의 시발점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4월 19일에 자유당 말기 부정부패의 정권이 학생들의 4·19의거로 붕괴되고 내각제(內閣制) 하에서 장 면정권이 들어섰으나 구태의연한 정치풍토와 무력한 국정운영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구데타를 막지 못하였다. 1960년 4월 19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대학생들이 일으킨 큰규모의 데모가 500여회 이상 일어났고 사회 전체가 주동이 되어 데모한 것이 35회 가량이었는데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회의 혼란상을 엿볼 수 있겠다. 이런 상황 타계를 위해 1964년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으려 할때 각계 각층에서 반대 데모가 일어났다. 1965년 12월 18일 한·일간의 통상조약이 조인되면서 일본의 자본이 물밀듯 이 땅에 밀려 들었으며 같은 해 역사상 처음으로 월남에 파병을 결정 47,000명의 국군을 파월하였다. 

 

이즈음 한국교회는 각 교단이 경쟁적으로 신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1968년 2월 당시 정부로부터 인가 받은 신학대학원은 한국신학대학원, 연합신학대학원 등 3개 대학원이 있었고 서울신대를 비롯하여 6개의 신학대학과 중앙신학, 대한신학, 순복음신학 등 22개 신학교가 있었다. 또한 지방신학으로 부산지방에 9개교 경기지방 2개교, 충청지방 6개교, 전라지방 5개교, 경상지방 6개교 기타 신학원이 5개교 등 도합 60여개 이상의 신학교가 설립되어 1만명의 신학생들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한국A.G.는 1965년 5월 13일부터 기독교수양관에서 제 14회 정기총회를 열고 문정열, 김진환, 최경락, 윤진환, 안병관 전도사를 목사로 임명했으며 서기원, 김창조, 추진옥, 이홍구, 유승창, 조병관, 권태갑, 김봉선, 박은석 씨를 전도사로 임명하는 한편, 목사의 자격, 목사의 임직과 해직 등 개헌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1965년 5월, 교세는 선교사는 8명, 목사 16명, 전도사 32명으로 집계됐다. 

 

<1980년 까지 하나님의 성회 교세비교표>

년도

교회수

목사수

전도사수

장년교인수

주교생수

비 고

1953

19

7

857

467

5개 교회만 보고

1958

37

3,684

2,867


1964

47

16

31

4,261

3,212


1970

107

44

58

17,172

5,227


1976

217

129

204

-

-


1980

408

301

370

199,916

-


 

 

1966년 제 5회 총회시는 교단 명칭 개헌안이 상정되었다. 설명자는 박광수 목사였고 내용은 '기독교 대한 순복음회'와 '기독교 대한 오순절회'였다.

개정안에 대한 제안 설명에서 윤진환 목사는 대외적으로 현 교단 명칭이 여호와 증인, 하나님의 집 등과 같이 납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했고, 현재 교단 신학교의 명칭이나, 다수 교회의 명칭이 순복음교회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개정안에 대해 투표에 들어갔는데 '순복음회'란 명칭은 16표로 부결, '오순절회'란 명칭 또한 23표로써 부결됐다.

'순복음(純福音)' 이라는 명칭에 대해 두어 가지 설(說)이 있는데, 1953년 신학교를 개교할 때 이미 교명(校名)을 '순복음신학교'라고 했으며 이것은 미 하나님의 성회가 즐겨쓰는 FULL GOSPEL이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라고 박정근 목사가 설명한다. 또 하나는 1954년, 세계 선교부 루이스 피 리챠드 선교사가 김해군 맥도리에 교회를 세우고 그 이름을 세우고 그 이름을 '순복음맥도교회'라 명명한 것을 위시하여 한국A.G.부산 선교부에서 방송 선교시간을 마련, 그 명칭을 '순복음의 시간'이라 이름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고(故) 지승권 목사는 주장했다. 

 

1960년대는 한국 A.G.에 있어서 오순절신학의 태동기(胎動期)라 할 수 있다. 월간 순복음이 창간되자 조용기 목사는 동지에 "병을 짊어지신 예수"라는 글을 연재하기 시작, 대내외적으로 요구되고 있는 오순절신학의 정립을 꾀했다.

변종호 박사의 주장에 따르면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신학은 ①영혼이 잘됨같이(靈善性全) ②범사에 잘 되고(凡事善化) ③강건하는(治病强健) 이른바 요한 3서 2절의 삼박자(三拍子) 신학이다.

이에 한국 교계는 환자치병(신유)을 위하여 기도하는 조목사에 대해 색안경을 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유 및 성령의 역사성에 대하여 .신학적 변증이 요구되었고, 박정근 목사가 "오순절 진리를 변증함"이라는 글을 순복음지에 연재하다가 백영사에서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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